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녕 성씨 (문단 편집) == 개요 == [[경상남도]] [[창녕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집단이다. [[시조]]는 [[고려]]시대 당시 [[창녕]] 지방의 토호(土豪)이며 호장 중윤을 지낸 '''성인보(成仁輔)'''. 시조 성인보의 출생연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성공필과 성한필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졌으며, 지금은 13파로 분파되었다. 성인보의 아버지는 신라 대관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약사」는 시조 인보가 고려 고종 때 성씨의 성을 창성한 것으로 전한다. 족보 기타 문헌 사료도 시조는 인보로서 상계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지며, 이것이 창녕 성씨의 유래이다. 성씨 족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창녕 성씨 족보 계축 보는 성종 24년 계축(서기 1493년)에 처음으로 편찬된 것으로, 성씨 족보에 처음으로 편찬되었다. 역사기록에 최초로 성씨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108년이지만 창녕 성씨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종(고려)|고려 문종]] 당시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를 응시할 수 없게 하여 [[고종(고려)|고려 고종]] 당시 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족보가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창녕 성씨의 족보는 그 중 대표적인 족보 중 하나이다. 족보의 경우 창녕성씨계축보(昌寧成氏癸丑譜)라 불리고 있으며 1493년(성종 24년) 성중성(成重性), 성현(成俔) 등이 간행하였다. 한국 전근대 사회에서 과거 시험의 사회적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가문이다. 특히 고려 시대에 비해서 과거 시험의 비중이 더 커지고, 음서의 범위가 축소되는 등 더욱 실력 위주 사회를 지향한 조선 시대에 있어서 과거 시험의 의미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창녕 성씨 가문과 유사한 경위를 통해서 조선 초기 발현한 가문이 광주(경기도 광주) 이씨 가문을 들 수 있다. 창녕 성씨 가문은 1456년 병자원옥 - 소위 [[사육신]] 사건을 겪으면서도 성석용-성달생-성승-[[성삼문]], 삼빙, 삼고 계열 외 다른 구성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대를 거치면서 크게 발흥하여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15세기 문물 제도 정착에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광주 이씨]] 가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산군]] 대에 불행하게도 크게 된서리를 맞은 가문 중 하나로 성현[* (成俔, 1439~1504) 조선 성종 대의 문신으로 [[성석린]]의 동생 성석인(成石珚, 1357~1414)의 증손으로 『[[악학궤범]]』, 『[[용재총화]]』를 남겼다.]은 [[부관참시]]되었고 [[성준(조선)|성준]]은 교살되었다. 그래도 후손들은 살아남아 [[성희안]], 우계 [[성혼]] 등 여러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영남 지방 최대 명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인구는 2015년 기준 182,377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